"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수 있습니다."

1901년 8월 10일, 한성부 용산방 동문외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이봉창 의사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진규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자란 그는, 1912년 천도교 계열의 미션스쿨인 문창소학교에 입학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가족은 효창동으로 이주하였고, 그는 생계를 위해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열차 운전 수습생으로 근무했습니다.
🎥 숏츠영상으로 만나는 이봉창 의사
일본 사회에 스며들고자 했던 청년
용산역에서 4년간 근무한 그는 역부, 전철수, 배차 담당자로 승진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 속도와 봉급에서 차별을 겪었습니다. 결국 철도국을 떠난 그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 양자가 되었고, 일본식 이름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를 얻었습니다.
당시 그는 조선인 정체성을 내려놓고 일본인처럼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일본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익히고, 일본인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자 했습니다. 3.1운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그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내선일체의 허구와 각성
그러나 1928년 쇼와 천황 즉위식을 앞두고, 그는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경찰에 구금됩니다. 편지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한 사건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동경은 사라지고, 그는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김구와의 만남, 그리고 결심
31세 무렵, 이봉창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됩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났으나, 일본인 같은 태도와 유창한 일본어 때문에 처음에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를 믿었고, 두 사람은 깊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는 “천황을 암살하겠다”는 뜻을 드러냈고, 김구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봉창은 “육신의 쾌락은 이미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헌신하겠다.”
는 결심을 밝혔습니다.

🎥 숏츠영상으로 만나는 이봉창 의사

사쿠라다몬 의거와 최후

1932년 1월 8일, 그는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본 천황을 향해 폭탄을投擲하는 의거를 감행했습니다. 비록 천황은 다치지 않았지만, 사건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일본 대심원은 같은 해 9월 30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향년 32세였습니다.
의거의 파장
의거 직후 조선의 친일파들은 앞다투어 일본에 사죄했고, 임시정부는 사건의 주체가 자신들이라 알렸습니다.
일제의 감시로 임시정부는 지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회생의 길을 열게 됩니다.

귀향과 추서
광복 후인 1946년 6월, 김구는 일본 정부로부터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았습니다.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삼의사로 모셔졌으며, 고향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동상)

느낀 점
유튜브 숏츠를 만들면서 인물에 대해 살펴보게 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인물, 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순하게 인간으로서 일본사회든 어디 사회든 스며들며 지내려 했을 뿐인데...
생사를 논 할 정도로 싸워서 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숨 쉬고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시대를 잘못 태어난 인물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젊은 시절에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일본에 넘어가서 지내려할정도로 아마 재정적으로 여유도 있었고 배움도 있어서 넘어간게 아니였을까? 그러나 시대가 그를 차별했고 결국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을 하게되는 울분을 표출한 인물이아니였나 싶네요.
이후, 어떻게보면 독립운동명분의 꼬득임이죠. 속았다면 속은것이고 이치가 부합했다면 부합한행동으로 폭탄을 투하 했겠지만, 일본순사에게 잡혔을때 그는 후회를 했다고 하네요.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행한대에 대한 반성과 후회를 했다고 하는데,
만약 저였다면 김구에 대해 후회도 했을것 같아요.
말이 이치가 맞았다지만, 김구입장에서는 천왕 마차오는 시기는 알았을것이고 이봉창의사를 써먹는 말처럼 쓴게 아닌가... 결국 '독립운동' 이라는 명분아래 이봉창의사는 움직였지만 결국 그도 그의 삶이 있었을텐데...
분명 본인도 " 육신의 쾌락은 이미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헌신하겠다" 라고까지 말했지만,
여성분들이 결혼식을 할때 이게 맞나? 지금 하는게 맞나 수십번 되세기듯이 이봉창의사도 폭탄을 던지기까지 얼마나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까...시간이 느리면서 빠르게 흘렀을 그 결심으로부터 던지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이후 폭탄을 던진후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말이 몸을 던진다지만 본능은 살고싶었을수도 있었을텐데....
또 우발적인 계기로 되어 "독립운동가"가 아닙니다. "독립유공자"인거지요.
유튜브 숏츠 영상으로 만들면서 많은것을 느꼈습니다.
🎥 숏츠영상으로 만나는 이봉창 의사
(효창공원)
아직 지방이라 가본적은 없지만 방문하게 되면 한번 영상이랑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위의 정보는 유튜브숏츠를 만들면서 찾은 나무위키를 기준으로 블로그를 제작했습니다.)
'역사속 위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최초의 사제, 믿음의 길을 걸은 순례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1) | 2025.08.26 |
|---|---|
| 코비 브라이언트, 영원한 블랙 맘바의 전설 (3) | 2025.08.25 |
|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김마리아. (12) | 2025.08.09 |
| 항생제의 시대를 연 과학자-알렉산더 플레밍 경 (Sir Alexander Fleming) (6) | 2025.08.07 |
| 민족의 혼을 지킨 사람, 간송 전형필 이야기 (3) | 2025.08.05 |
